이 문서는 1810년(순조 10)에 業武 元興學이 春川府로부터 발급받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원흥학은 춘천부 南山外面 君子谷里 제25통 4호에 처 靑山鄭氏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
문서를 발급받을 당시 원흥학의 나이는 36세로 을미(1775)생이며 본관은 원주이다. 그의 부친은 學生 元奉彦이고 조부는 학생 元莫澄이며 증조부는 老職 嘉義大夫 元得吉이다. 외조부는 학생 李尙伊로 본관은 전주이다. 1786년 연관문서와 비교했을 때 부친 원봉언과 조부 원막징의 이름 글자가 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원봉언의 이름 글자가 奉言에서 奉彦으로, 원막징의 이름 글자가 莫澂에서 莫澄으로 바뀌었다. 또한 원봉언과 원막징, 그리고 외조부인 이상이의 직역을 다르게 기재했다. 봉언은 保人에서 학생으로 기재되었고 막징과 이상이는 양인에서 학생으로 직역이 바뀐 것이 확인된다.
처 청산정씨는 36세로 을미(1775)생이며 부친은 학생 鄭春赽이다. 조부는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鄭三鳳이며 증조부는 학생 鄭海敏이다. 외조부는 學生 李時山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문서에 기재되어 있진 않으나 당시 원흥학은 아들 두 명이 있었다. 장남 원두용의 나이는 15세로 병진(1796)생이고, 차남 원준용은 3세로 무진(1808)생이다.
준호구의 작성양식은 경국대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발급년도의 연호를 기재하고 기두어를 '考成籍戶口帳內'로 하며 주호의 가족사항과 주호내외의 四祖사항을 連書로 작성한 뒤, 官印을 찍어 관의 확인 절차를 거친다.
이 문서 역시 법전에 명시된 작성방식을 따랐고 마지막 행에는 丁卯戶口相準者라 기재하여 정묘년(1807)의 호구문서와 대조하여 작성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 옆에는 春川府使의 署押을 찍었고, 하단에 春川府印과 周挾改印을 찍어 관의 인증을 받은 문서임을 나타냈다.
주호가 거주하던 남산외면 군자곡리는 현재의 춘천 東山面 君子里이다. 군자곡리는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으로 東山外一作面에 병합되었고, 동산외일작면은 1917년 동산면이라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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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조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