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幼學 元用奎가 春川府에서 발급받은 준호구로, 발급시기는 1879년(고종 16)이다.
1879년 당시 원용규의 나이는 70세이고 무진(1808)생이며 본관은 원주이다. 원용규의 거주지는 춘천부 南山外一作面 下君子谷里 제26통 5호로, 함께 거주하던 처 金海金氏가 사망하여 혼자 살고 있다. 원용규의 사조사항과 생년, 처의 본관과 생년을 통해 元俊用이 개명한 이름인 것을 알 수 있으며, 1870년 이후에 개명한 것으로 파악된다.
문서에 기재된 원용규의 부친은 學生 元興鎭이고 조부는 학생 元福哲이다. 증조부는 학생 元泰澄이며 외조부는 학생 鄭春澤으로 본관은 靑山이다. 이전 시기의 연관문서와 비교해 보면 주호 사조들의 이름이 달리 기재된 것이 확인된다. 먼저 부친은 元興學에서 元興鎭으로 기재되었다. 조부는 元奉言, 元奉彦, 元鳳憲, 元福哲 순서로 이름이 바뀌어서 기재되었다. 증조부는 元莫澂, 元莫澄, 元澄秀, 元泰澄 순서로 바뀐 것이 확인된다. 외조부의 경우에는 鄭春赽에서 春基로 기재했다가 다시 鄭春澤으로 기재했다.
이 문서는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형식이 혼재되어 있다. 이 문서에서는 준호구의 일반적인 기재사항 외에 문서 작성방식이 준호구의 방식인 連書가 아닌 호구단자의 방식인 열서로 기재되어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각 주호가 호구단자 형식이나 준호구 형식의 문서를 1장 작성하여 제출하면 이를 토대로 호적을 등서한 후 돌려주었는데, 이 준호구도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문서의 주호가 거주하던 남산외일작면 하군자곡리는 현재 춘천시 東山面 君子里이다. 이 지역은 원래 남산외일작면에 속했지만,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 되면서 東山外一作面으로 병합되었다. 1917년이 되면서 동산면으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文書의 작성 과정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조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