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68년(고종 5)에 春川府에서 幼學 元斗用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당시 원두용의 나이는 73세로 병진(1796)생이며 본관은 원주이다. 원두용은 춘천부 南山外一作面 下君子谷里 제1통 5호에 아우 유학 元俊用과 제수 金海金氏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
문서에 기재된 원두용의 사조사항을 보면 부친은 學生 元興學이다. 조부는 학생 元鳳憲이고 증조부는 학생 元澄秀이다. 외조부는 학생 鄭春澤으로 본관은 청산이다. 이전 시기의 연관문서를 보면 조부인 원봉헌과 증조부인 원징수 그리고 외조부인 정춘택의 글자가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원봉헌은 奉言에서 奉彦으로, 그리고 鳳憲 순서대로 이름이 달리 기재되었다. 그 다음 원징수는 莫澂, 莫澄에서 澄秀로, 정춘택은 鄭春赽, 鄭春基, 鄭春澤으로 달리 기재한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원두용의 처는 사망한 상태이기 때문에 妻故라 기재했다. 처가 사망한 정확한 시기를 알 수가 없다.
함께 거주하고 있는 아우 원준용의 나이는 61세로 무진(1808)생이고, 그의 처 김해김씨도 원준용과 동갑이다. 대개 주호와의 관계를 나타낼 때 형 혹은 아우의 처를 兄嫂 혹은 弟嫂라 기재하나, 현 문서에서는 처로 기재했다.
이 문서는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형식이 혼재되어 있다. 이 문서에서는 준호구의 일반적인 기재사항 외에 문서 작성방식이 준호구의 방식인 連書가 아닌 호구단자의 방식인 열서로 기재되어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각 주호가 호구단자 형식이나 준호구 형식의 문서를 1장 작성하여 제출하면 이를 토대로 호적을 등서한 후 돌려주었는데, 이 준호구도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현 문서의 주호가 거주한 남산외일작면 하군자곡리는 현재 춘천시 東山面 君子里에 해당한다. 원래 이 지역은 남산외일작면 소속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으로 東山外一作面에 편입되었고, 1917년에 다시 동산면이라 명칭이 바뀌었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文書의 작성 과정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조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