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8년(순조28)에 華城府에서 幼學 尹行斗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 문서는 무자년(1828)에 성적한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주호 윤행두는 경신(1800)생으로 29세이고, 본관은 남원이다. 문서에는 윤행두가 개명한 사실을 기재하고 있지만 개명 전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연관문서에 따르면 윤행두의 개명 전 이름은 윤행하이다.
주호의 거주지는 문서가 훼손이 되어 정확한 주소는 알 수 없지만 연관문서를 통해 北部 光敎里임을 알 수 있다. 화성부 북부 광교리는 지금의 수원시 영통구 일대로 짐작된다.
주호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通訓大夫 行醴泉郡守 兼安東鎭管兵馬同僉節制使 尹鼎植이고, 조부는 通訓大夫 行司䆃寺僉正 尹昌胤이며, 증조부는 通德郞 尹熈世이다. 외조부는 通德郞 李圭容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가족으로는 처 靑松沈氏가 있다. 청송심씨는 계해생인데, 인적사항을 기재할 때 나이를 기재하지 않고 생년간지와 본관만 기재하였다. 본 준호구의 작성시기와 처의 생년간지를 통해 청송심씨의 생년은 1803년이고 나이는 26세임을 알 수 있다. 처의 부친은 通德郞 沈明之이고, 조부는 通訓大夫 行利川都護府使 利川鎭管兵馬同僉節制使 沈鍷이며, 증조부는 通德郞 沈麟賢이다. 외조부는 通德郞 李殷權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소유한 노비의 수는 3口인데, 3구 모두 부모의 이름을 알 수 없다고 기재되어 있다.
문서를 살펴보면 좌측에는 留守와 判官의 署押이 있고, 노비 기재사항 위에는 官印과 周挾改印이 겹쳐서 찍혀있다. 화성유수부는 1793년에 수원도호부에서 승격하였고, 유수 외에 판관 1명을 두었기 때문에 본 준호구에서는 유수의 서압과 판관의 서압을 모두 찍은 것으로 판단된다.
문서의 보존상태를 살펴보면 여러 곳에 구멍이 관찰된다. 이 때문에 주호의 거주지 및 조부의 이름, 처의 증조부의 직역을 확인할 수 없지만 연관문서를 통해 추정이 가능하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文書의 작성 과정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신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