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780년(정조 4) 漢城府에서 通訓大夫 行寧陵令 尹昌胤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 준호구는 경자년(1780)에 성적한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주호 윤창윤은 갑인(1734)생으로 47세이며, 본관은 남원이다. 윤창윤의 직역은 1774년 준호구에서는 幼學으로 기재되었는데 본 문서에서는 통훈대부 행영릉령으로 기재하고 있다.
주호의 거주지인 한성부 南部 明禮坊 大龍洞契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남대문로2가・명동1・2가・충무로1가 일대로 짐작된다.
주호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通德郞 尹熙世이고, 생부는 奉正大夫 懿陵參奉 尹熙績이며, 조부는 通訓大夫 行信川郡守 黃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尹翼駿이다. 증조부는 贈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判義禁府事 世子貳師 知經筵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行通政大夫 守黃海道觀察使 兼兵馬水軍節度使 尹攀이고, 외조부는 嘉善大夫 同知敦寧府都正 朴師任으로 본관은 반남이다.
생부를 기재한 것으로 보아 윤창윤은 윤희세의 양자임을 알 수 있다.
주호의 가족은 처 星州李氏, 아들 유학 尹璞 내외가 있다. 성주이씨는 46세로 을묘(1735)생이다. 처의 부친은 成均生員 李熏普이고, 조부는 通訓大夫 行戶曹佐郞 李挻柱이며, 증조부는 嘉善大夫 司憲府大司憲 致仕奉朝賀 李世瑾이다. 외조부는 嘉善大夫 行司諫院大司諫 金濰로 본관은 안동이다.
아들 윤박은 20세로 신사(1761)생이고, 며느리 창녕조씨(昌寧曺氏)는 21세로 경진(1760)생이다.
노비는 奴婢秩, 外方奴婢秩, 逃亡奴婢秩을 구분하여 순차적으로 기재하였고, 주호 및 가족에 대한 기재내용과 다르게 列書하였다. 기재된 노비는 모두 64구이고 그 중 솔거노비는 36구, 외방노비는 14구, 도망노비는 14구이다.
이 준호구에는 堂上, 郎廳, 監董官의 署押이 있고, 3개의 官印이 찍혀있다. 또한 周挾改印은 좌측하단에 찍혀 있다.
문서의 보존상태를 살펴보면 문서 상단과 하단에 일정한 크기의 오염이 반복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문서가 접힌 상태로 보관되어 오다 오염이 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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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신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