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6년(정조 10) 漢城府에서 通訓大夫 前行司導寺僉正 尹昌胤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이 문서는 계묘년(1783)에 작성한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주호 윤창윤은 갑인(1734)생으로 53세이며, 본관은 남원이다.
주호의 거주지인 한성부 南部 明禮坊 大龍洞契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남대문로2가・명동1・2가・충무로1가 일대로 짐작된다.
주호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通德郞 尹熙世이고, 생부는 奉正大夫 懿陵參奉 尹熙績이며, 조부는 通訓大夫 行信川郡守 黃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尹翼駿이다. 증조부는 贈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判義禁府事 世子貳師 知經筵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行通政大夫 守黃海道觀察使 兼兵馬水軍節度使 尹攀이고, 외조부는 嘉善大夫 同知敦寧府都正 朴師任으로 본관은 반남이다.
가족으로는 처 성주이씨(星州李氏), 첫째 아들 통덕랑 尹亨植 내외, 둘째 아들 통덕랑 尹義植 내외가 있다. 星州李氏는 52세로 을묘(1735)생이다. 처의 부친은 成均生員 李熏普이고, 조부는 通訓大夫 行戶曹佐郞 李挻柱이며, 증조부는 嘉善大夫 司憲府大司憲 致仕奉朝賀 李世瑾이다. 외조부는 嘉善大夫 行司諫院大司諫 金濰로 본관은 안동이다.
첫째 아들 윤형식은 26세로 신사(1761)생이고, 첫째 며느리 昌寧曺氏는 27세로 경진(1760)생이다. 둘째 아들 윤의식은 18세로 기축(1769)생이고, 둘째 며느리 完山李氏는 17세로 경인(1770)생이다. 한편 1774년 준호구에서 윤형식의 이름이 尹璞으로 기재되어 있어 12년 사이에 개명한 것을 알 수 있다.
소유한 노비의 수는 89口로 1774년 준호구와 다르게 외방노비와 도망노비는 기재되지 않았다. 그리고 노비의 수도 64구였던 것이 89구로 대폭 증가 하였다.
이 준호구에는 堂上, 郎廳, 監董官의 署押이 있고, 3개의 官印이 찍혀있다. 또한 周挾改印은 좌측하단에 찍혀 있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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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신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