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윤창윤(尹昌胤) 준호구(準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789.1111-20180501.2017000363
URL
복사
복사하기
·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한성부(漢城府)
수취 : 윤창윤(尹昌胤)
· 작성지역 한성부
· 작성시기 乾隆五十四年(1789)
· 형태사항 78.5 X 62.7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3 (적색, 정방형, 7.9*7.9, 漢城府印)
1 (흑색, 장방형, 17.0*3.7, 周挾改印)
· 원소장처 한성 남원윤씨
· 현소장처 원주역사박물관

연결자료

안내정보

1789년(정조 10) 한성부(漢城府)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 전행사도시첨정(前行司導寺僉正) 윤창윤(尹昌胤)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윤창윤갑인(1734)생으로 56세이며, 본관은 남원이다. 윤창윤의 가족으로는 처 성주이씨(星州李氏)가 있다. 거주지인 한성부 남부(南部) 예방(禮坊) 대룡동계(大龍洞契)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남대문로2가・명동1・2가・충무로1가 일대로 짐작된다.
소유한 노비는 83구(口)가 있는데 이 중 1구는 노망노비이다.

상세정보

1789년(정조 13) 漢城府에서 通訓大夫 前行司導寺僉正 尹昌胤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 문서는 병오년(1786)에 성적한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주호 윤창윤갑인(1734)생으로 56세이며, 본관은 남원이다. 주호의 거주지인 한성부 南部 禮坊 大龍洞契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남대문로2가・명동1・2가・충무로1가 일대로 짐작된다.
주호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通德郞 尹熙世이고, 생부는 奉正大夫 懿陵參奉 尹熙績이며, 조부는 通訓大夫 行信川郡守 黃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尹翼駿이다. 증조부는 贈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判義禁府事 世子貳師 知經筵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行通政大夫 守黃海道觀察 兼兵馬水軍節度使 尹攀이고, 외조부는 嘉善大夫 同知敦寧府事 朴師任으로 본관은 반남이다. 생부가 기재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윤창윤이 입양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족으로는 처 星州李氏가 있다. 성주이씨는 55세로 을묘(1735)생이다. 처의 부친은 成均生員 李熏普이고, 조부는 通訓大夫 行戶曹佐郞 李挻柱이며, 증조부는 嘉善大夫 司憲府大司憲 致仕奉朝賀 李世瑾이다. 외조부는 嘉善大夫 行司諫院大司諫 金濰로 본관은 안동이다.
1780년 준호구에서는 아들 윤형식 내외와 윤의식 내외가 기재되어 있는데, 본 문서에서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기재된 노비의 수는 83口인데 이 중 1구는 도망노비이다. 따라서 소유한 노비의 수는 82구이다.
또한 이전문서에서는 堂上郎廳監董官의 署押이 확인되나 본 문서에서는 당상, 낭청, 감동관을 기재하지 않고 3개의 서압이 확인된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文書의 작성 과정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신태훈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