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708년(숙종 34) 漢城府에서 幼學 尹翼駿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무자년(1708)에 성적한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당시 주호 윤익준은 무오(1678)생으로 31세이며, 본관은 남원이다. 주호의 거주지인 한성부 北部 安國坊契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화동 일대로 짐작된다.
주호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通政大夫 守黃海道觀察使 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 尹攀이고, 조부는 贈崇政大夫 議政府右贊成 兼判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行嘉善大夫 同知敦寧府事 尹天衢이며, 증조부는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世子左賓客 行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尹祁이다. 외조부는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同知義禁府成均館事 五衛都摠府副摠管 世子右副賓客 李廷夔로 본관은 한산이다.
가족으로는 처 綾城具氏, 딸 1명이 있다. 능성구씨는 34세로 을묘(1675)생이다. 처의 부친은 通訓大夫 行忠勳府都事 具廷柱이고, 조부는 通訓大夫 行成川都護府使 具文濟이며, 증조부는 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兼領經筵事 行嘉義大夫 同知敦寧府事 五衛都摠府副摠管綾南君 具鏊이다. 외조부는 通訓大夫 禮賓寺正 鄭載岳으로 본관은 동래이다.
딸은 이름이 기재되지 않고, 나이와 생년간지만 기재되어 있다. 딸의 나이는 14세이고, 을해(1695)생이다.
조선시대 호적은 15세 이상의 男丁인구와 戶의 수 파악에 주안점이 있었다. 그래서 호구문서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15세 미만의 남성과 여성을 기재하지 않았는데 본 문서에서는 어린 딸이 기재되어 예외적인 사례로 보인다.
소유하고 있는 노비는 총 15口로 남자종 6구와 여자종 9구가 있다.
문서 말미에 '新戶口准給者'라 기재되어 있어 윤익준은 이 시기에 한성부로 새롭게 入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준호구에는 堂上, 郎廳, 監董官의 署押이 있고, 3개의 官印이 찍혀있다. 또한 周挾改印은 좌측하단에 찍혀 있다.
문서의 보존상태를 살펴보면 문서 상단, 중앙, 하단에 일정한 크기의 오염이 반복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문서가 접힌 상태로 보관되어 오다 오염이 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한성 남원윤씨 가문에는 총 14통 준호구가 전해졌다. 이 중 윤익준이 주호로 기재된 문서는 4통이고, 손자 윤창윤이 주호인 문서는 5통, 증손자 윤형식이 주호인 문서는 1통, 고손자인 윤행두(개명 윤행하) 준호구는 3통이 있다. 이 문서는 14통의 준호구 가운데 작성시기가 가장 빠른 문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