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7년(정조 16) 漢城府에서 通德郞 尹亨植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 문서는 정묘년(1807)에 성적한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주호 윤형식은 신사(1761)생으로 47세이며, 본관은 남원이다.
주호의 거주지인 한성부 南部 明禮坊 大龍洞契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남대문로2가・명동1・2가・충무로1가 일대로 짐작된다.
주호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通訓大夫 行司導寺僉正 尹昌胤이고, 조부는 通德郞 尹熈世이며, 증조부는 通訓大夫 行信川郡守 黃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尹翼駿이다. 외조부는 成均生員 李薰普로 본관은 성주이다.
윤형식은 처 昌寧曺氏, 아들 유학 尹行德, 며느리 豊山洪氏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
처 창녕조씨는 48세로 경진(1769)생이다. 처의 부친은 通德郞 曺允亮이고, 조부는 通訓大夫 行弘文館校理 兼經筵春秋館記注官編修官 世子侍講院侍讀官 知製敎 曺命敬이며, 증조부는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兼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行通政大夫 掌隸院判決事 曺夏奇이다. 외조부는 嘉善大夫 行司憲府大司憲 元景濂으로 본관은 원주이다.
아들 윤행덕은 23세로 을사(1785)생이며, 며느리 풍산홍씨는 24세로 갑진(1784)생이다.
소유한 노비는 43口이다. 본 문서에는 주호 및 가족에 대한 내용은 連書하였는데, 노비 기재 사항에 대해서 행을 구분하고 단을 나누어 列書하였다. 부친인 윤창윤 준호구에서 82구의 노비가 기재된 것과 비교하여 절반가량 줄어들었다.
문서를 살펴보면 官印을 3개 찍었으며, 그 중 좌측 官印이 周挾字改印과 겹쳐 찍혀있다. 이전문서에서는 堂上・郎廳・監董官의 署押을 찍었는데, 본 문서에서는 당상만 적혀 있고 낭청과 감동관은 서압만 확인된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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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신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