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73년(고종 10)에 三嘉縣 栢山面 栢亦村 제4호에 거주하는 幼學 金有玉이 작성한 호구단자이다. 호수는 문서가 작성된 이후 추가로 기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에는 주호의 인적사항과 가족 및 사조사항에 대해 호구단자 작성방식인 列書로 기록하였다. 문서식은 호구단자이지만 문서에서 관의 증빙을 받아 발급하였음을 의미하는 官印, 署押, 周挾無改印 등을 확인할 수 있어 준호구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유옥이 거주하는 삼가현 백산면 백역촌은 현재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백역리이다.
현전하는 합천 김해김씨가문의 호구문서는 11건이 현전하는데 김유옥의 문서가 6건, 金基浹의 문서가 3건, 金有億의 문서가 2건이 있다.
문서에 따르면 유학 김유옥의 당시 나이는 52세로 임오(1822)생이고 본관은 김해이다. 김유옥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學生 金百鎰이고, 조부는 학생 金聲律이며, 증조부는 학생 金益宗이다. 외조부는 학생 許耆로 본관은 하양이다. 이 문서에서는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1876년 호구단자에 생부 金萬鎰이 기재되어 있고 김유옥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이 당시 김유옥은 이미 김백일의 양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 문서에는 생부에 대해서 기재하지 않았다.
처 吳氏의 나이는 55세로 임오(1822)생이고, 본관은 함양이다. 오씨의 출생년도와 나이를 비교해 봤을 때 오씨의 나이는 52세여야 하지만, 55세로 기재하고 있어 이는 오기로 추정된다.
오씨의 부친은 학생 吳仁大이고, 조부는 학생 吳守範이며, 증조부 학생 吳善姬이다. 외조부는 학생 姜禹龍으로 본관은 진양이다.
김유옥의 아들 金性中의 나이는 24세이고, 경술년(1850)생이다. 김성중은 金龍碩에서 개명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후 연관문서를 통해 김성중은 金基浹으로 다시 개명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유하고 있는 노비는 여자종 丁化 1口인데, 이후의 다른 연관문서에서는 남자종으로 기재하고 있다.
이 호구단자는 官印과 縣監의 署押의 署押과 周挾無改印을 찍었다. 다만 서압의 경우 노비가 기재된 좌측부분에 흐릿하게 남아있다.
문서의 말미에 이전 식년인 경오년(1870)이 아닌 을묘년(1867)의 호구와 대조하여 확인하였음을 기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