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70년(고종7)에 三嘉縣 栢山面 栢亦村 거주하는 幼學 金有億이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유학 김유억의 당시 나이는 47세로 갑신(1824)생이고, 본관은 김해이다. 이전 1867년 김유억 준호구에서 김유억의 나이는 46세였다. 이전 문서와 본 문서의 연도 차이가 3년임에도 불구하고 김유억의 나이는 47세로 1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또한 이전 연관문서의 출생간지가 임오생에서 갑신생으로 바뀌어 기재되었다. 김유억은 이후 연관문서를 통해서 이름이 金有玉으로 바뀌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김유억의 나이는 49세이고, 임오(1822)생으로 이 문서에서 기재된 47세는 오기임을 알 수 있다.
김유억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學生 金百鎰이고, 조부는 학생 金聲律이며, 증조부는 학생 金益宗이다. 외조부는 학생 許耆로 본관은 하양이다. 하양은 현재 경상북도 경산의 옛 지명이다.
처 咸陽吳氏의 나이는 46세이고, 임오(1822)생이다. 오씨의 사조사항을 보면 부친은 학생 吳仁大이고, 조부는 학생 吳守範이며, 증조부는 학생 吳善姬이다. 외조부는 학생 姜禹龍으로 본관은 진주이다.
김유억과 오씨 슬하에 아들이 1명이 있는데 이름은 金龍碩으로 나이는 21세이고, 생년은 경술(1850)이다. 김용석의 이름은 연관문서를 통해 개명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1873년 호구단자에 金性中으로 개명한 사실이 기재 되었고, 1884년 호구단자에서는 개명한 사실을 기재하지는 않았지만 인적사항을 볼 때 김성중에서 金基浹으로 다시 개명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노비는 여자종 1口가 있다.
이 호구단자는 官印과 行縣監의 署押, 그리고 周挾無改印을 찍었다. 호구단자는 官에서 3년마다 호구장적을 만들 때, 주호가 자신의 호의 상황을 적어서 官에 제출한 문서이고, 준호구는 관에서 호적장적에 의거하여 개인의 호적 사항을 증명해 준 문서이다. 그런데 본 문서는 호구단자임에도 불구하고 준호구처럼 중국연호가 기재되어 있고 문서의 말미에 이전 식년인 정묘년(1867)의 호구와 대조하여 확인하였음을 기재하였다. 또한 관인과 현감의 서압, 주협무개인을 찍어 문서 내용을 확인하였음을 밝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호구단자와 준호구가 단일화된 현상은 18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제출용 호구단자와 증명용 준호구가 호구단자만으로 준호구의 역할을 포괄하게 되는 변화이다.
김유억이 거주하는 삼가현 백산면 백역촌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백역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