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幼學 李宗德이 75세에 작성하여 靈光郡에 제출한 호적단자이다. 문서에는 주호의 거주지가 어느 지역인지 기재되지 않았으나 1687년 연관문서를 통해 영광군임을 파악할 수 있다.
문서에 따르면 이종덕은 陳良面 支莊里 第1統 第4戶에서 거주하였다. 이종덕의 연관문서를 살펴보면 지장리의 한자가 바뀐 것이 확인되는데, 이 문서부터 支長里에서 支莊里로 바뀌었다. 이종덕은 정축(1757)생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주호의 사조를 보면 부친은 學生 李光瑞이고, 조부는 학생 李攸이며, 증조부는 通德郞 李後大이다. 외조부는 학생 金萬華로 본관은 광산이다.
처 河陰奉氏는 74세로 무인(1758)생이다. 처의 사조를 보면 부친은 학생 奉章煥이고, 조부는 학생 奉秀寬이며, 증조부는 학생 奉天濡이다. 외조부는 학생 金光澤으로 본관은 광산이다.
아들 유학 李永國은 李相永으로 개명했고, 나이는 42세이며, 경술(1790)생이다. 며느리 慶州金氏는 이상영과 동갑이다.
소유한 노비는 賤口秩을 적은 뒤에 여자종 1口를 기재했다.
문서 말미에 道光十一年 辛卯라 기재해 1831년에 작성한 문서임을 밝혔다.
이 문서를 살펴보면 첫 행에 주거지를 기재하고 행을 옮겨 본문을 列書했으며 통・호수는 黑默으로 추기했다. 문서 중앙 하단에는 靈光郡印과 周挾字改印을 겹쳐 찍었으며 좌측에는 行節制使의 署押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이 문서는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양식이 혼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문서의 보존 상태를 보면 상단과 중단에 각각 유사한 형태의 오염이 확인되는데, 이것은 문서가 접혀있는 상태에서 오염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文書의 작성 과정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조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