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76년(고종 13) 정월에 작성된 幼學 李用楫의 호구단자이다.
문서를 살펴보면 첫 행에 '戶口單子'라고 명시하였지만 주호의 인적사항과 가족구성원 및 주호 내외의 사조에 대해 連書한 점, 기두어가 '考癸酉式成籍戶口帳內'인 점, 官의 증빙을 받아 발급되었음을 의미하는 官印, 周挾改印, 署押을 확인할 수 있는 점 등을 통해 이 문서는 준호구임을 알 수 있다.
문서 좌측 상단에는 '行判官'을 기재하였고, 행판관 글자 위에 '帖'자를 찍혀있으며, 아래에는 서압이 있다. 관인과 주협개인은 문서 하단 여백에 찍었는데, 두 인장은 서로 겹쳐져 있다.
문서에 따르면 이용즙은 신묘(1831)생이고, 당시 나이는 46세이며, 본관은 평창이다. 연관문서인 1870년 李相基의 호구단자에는 李用楫에서 李冝楫으로 개명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이 문서에서는 다시 李用楫으로 기재하였다.
이용즙의 사조를 살펴보면 부친은 學生 李相基이고, 조부는 학생 李國莘이며, 증조부는 학생 李就煥이다. 외조부는 학생 朱植으로 본관은 능성이다.
가족구성원은 모두 3명으로 처 李氏, 아우 유학 李彦楫, 제수 金氏가 있다. 처 이씨는 경자(1840)생이고, 나이는 37세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경주이씨의 부친은 학생 李周根이고 조부는 학생 李萬基이다. 증조부는 학생 永淑이며 외조부는 본관이 평산인 학생 申大永이다.
아우 이언즙의 나이는 35세이고, 임인(1842)생이다. 제수 김씨는 당시 32세로 을사(1845)생이며, 본관은 부안이다.
이용즙과 그의 가족이 거주한 곳은 左邊面 2里인데, 이 지역은 현재 영월군 주천면에 해당한다.
문서에 기재된 노비는 남자종 1口가 있는데, 이름은 千得이고, 정묘생이다. 문서에는 사망하였다고 적혀 있다. 노비를 기재한 행 마지막에는 '癸酉戶口相準者'라고 적혀 있어 이 문서는 계유년(1873)에 작성된 호구문서를 대조하여 발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