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19년(순조 19)에 平昌郡에서 幼學 李國莘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준호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이국신은 平昌郡 南面 入呑里에 거주하는데, 입탄리는 현재 행정구역상 평창군 평창읍 입탄리에 해당한다. 이국신의 당시 나이는 52세이고, 무자(1768)생이며, 본관은 평창이다.
이국신의 父는 學生 李就煥이고, 祖는 학생 李壽謙이다. 曾祖는 학생 李泰禎이며, 外祖는 학생 辛聖欽으로 본관은 영월이다.
가족으로는 妻 李氏가 기재되어 있다. 생년이 기축년(1769)인 이씨의 당시 나이는 51세이고, 본관은 성주이다.
이 문서에는 자녀에 대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1831년에 작성된 준호구를 살펴보면 아들의 이름은 李相殷이고, 생년은 계유년(1813)으로 당시 나이는 7세임을 알 수 있다.
준호구에는 主戶의 사조와 함께 처의 사조도 기록된다. 처 이씨의 사조를 살펴보면 부친은 학생 李光莢이고, 조부는 학생 李世華이며, 증조부는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李重蕃이다. 외조부는 학생 丁泰龍으로 본관은 나주이다.
이국신이 소유한 노비는 여자종 1口와 남자종 1구가 있다. 여자종 順分은 당시 46세이고 갑오(1774)생이다. 남자종 千得은 순분의 1소생인데, 정묘(1807)생으로 나이는 13세이다.
연관문서인 1816년에 작성된 이국신 준호구에는 逃亡奴 分香과 순분의 2소생 順玉에 대해 기재되었는데, 이 준호구에서는 두 노비에 대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문서에는 일반적으로 준호구에서 볼 수 있는 官印과 行郡守의 署押, 周挾改印 등이 찍혀 있다. 또한 문서의 좌측 상단에는 帖印도 찍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