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22년(순조 22) 正月에 平昌郡에서 南面 入呑里에 거주하는 李國莘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이국신이 살았던 입탄리는 현재 행정구역상 평창군 평창읍 입탄리에 해당한다.
임오년(1822)에 成籍한 戶口帳籍을 고찰하여 작성된 이 준호구에 따르면 이국신은 무자(1768)생으로 당시 나이는 55세이고, 직역은 幼學이며, 본관은 평창이다.
이국신의 가족구성원으로는 妻 李氏가 있다. 본관이 성주인 이씨의 생년은 기축년(1769)이고, 나이는 이국신 보다 한 살 적은 54세이다.
이 문서에는 자녀에 대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연관문서인 1831년에 작성된 준호구를 살펴보면 아들의 인적사항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 아들의 이름은 李相殷이고, 생년은 계유년(1813)이다. 이를 통해 이 당시 이상은의 나이는 10세임을 알 수 있다.
준호구에는 主戶의 인적사항 및 가족사항과 더불어 주호 내외의 사조와 소유한 노비에 대한 사항도 기재된다.
주호 내외의 사조를 살펴보면 이국신의 父는 學生 李就煥이고, 祖는 학생 李壽謙이다. 曾祖는 학생 李泰禎이며, 外祖는 학생 辛聖欽으로 본관은 영월이다. 처 이씨의 부친은 학생 李光莢이고, 조부는 학생 李世華이며, 증조부는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李重蕃이다. 외조부는 학생 丁泰龍이고 본관은 나주이다.
1822년 당시 이국신 가문에서 소유한 노비는 여자종 1口와 남자종 1구가 있다. 여자종 順分은 갑오(1774)생으로 당시 나이는 49세이다. 남자종의 이름은 千得인데, 천득은 순분의 1소생이다. 천득의 생년은 정묘년(1807)이고, 나이는 16세이다.
문서에는 준호구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官印과 行郡守의 署押, 周挾改印 등이 찍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