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정월 11일 金華鎭이 述軒 李培仁에게 보낸 간찰이다.
간찰은 書簡, 書信, 書札, 簡牘 등으로 부르며, 고문서 형태로 전해진다. 문집에 수록된 간찰은 '書'로 분류하여 수록하기도 하는데, '서'란 고문서 형태의 간찰이 문집에 수록된 것을 말한다. 간찰은 일반적으로 皮封과 내용으로 구성되고, 내용은 다시 本紙와 別紙로 구별할 수 있다. 흔히 간찰이라고 하는 것은 편지의 본문인 본지를 의미한다. 小紙, 胎紙 등으로도 불리는 별지에는 본지에 적기 어려운 구체적인 내용이나 보내는 선물, 은밀한 부탁이나 청탁 등이 기록된다.
간찰의 내용은 書頭, 候問, 自叙, 述事, 結尾로 나뉜다. 서두에는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안부 인사를 적고, 후문에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다. 자서에는 간찰을 보내는 사람 본인의 근황을 서술하며, 술사에서는 간찰을 보낸 이유를 적고, 결미는 간찰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간단히 끝맺는 말과 날짜, 성명, 올림[재배(再拜)] 등의 항목을 순서대로 적는다.
발신인 김화진은 생몰년을 알 수 없으나 柳麟錫 선생 문인록에 따르면 본관은 商山이고, 호는 管山이며 아들은 洪一이다.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수신인 이배인(1873~1945)에게 '大兄'이라고 호칭하고 있어 이배인보다 아래 연배임을 알 수 있다.
이배인은 강원도 춘천군 남산면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學淵이다. 부친은 習齋 李昭應(1852~1930) 선생이다. 이배인의 아들 李文白이 간행한 述軒遺稿에 따르면 이배인은 부친 이소응과 마찬가지로 제천 지역 화서학파 인사들과 교류하였으며 부친과 함께 남동막, 공전리, 청풍 안간리, 요동 회인현 대황구 등으로 옮겨 다니며 생활하였다.
내용을 살펴보면 김화진은 안부인사에서 이배인에게 안부를 물으며 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찾아뵙지 못한 죄송스런 마음을 전하며 이배인 집안과 주변이 두루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자신의 근황에 대해서는 나이를 먹어 뜻이 약해지고 있고 슬픈 마음이며, 집안 사촌 行源이 7월에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김화진은 스승님 의옹(毅翁, 류인석)의 묘소 이장에 관한 것으로 장지의 선정을 주요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먼저 이배인의 주소는 直窩를 통해 알았다고 밝히고 있다. 스승님의 묘소는 원래 한해 전인 1933년에 묘소를 이장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했고, 직와의 편지를 통해 묘소를 서울로 하자는 의견이 있는 것도 알았지만 바로 선산이 있는 춘천으로 운구하도록 권고해 달라고 이배인에게 요청하였다. 그리고 춘천에 도착할 날짜를 먼저 이곳으로 알려주면 자신이 먼저 춘천에 가서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김화진은 국내에 거주하고 있지만 춘천에 살지는 않고, 이배인은 류인석의 무덤이 있는 중국에 거주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편지에서 언급되고 있는 의옹은 조선말기 巨儒로 항일의병투쟁을 주도하고 해외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독립운동의 지도자 義菴 柳麟錫(1842~1915)이다. 본관은 고흥이고, 자는 汝聖이다. 선생은 춘천시 남면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출생하였으며, 1896년 중국 통화현으로 망명하였고, 이후 국내활동과 해외 활동을 병행하다가 1910년 6월 13도의군을 결성하고 都總裁로 추대되었다. 한일병탄이후에도 러시아 연해주, 중국 서간도 일대에서 항일운동을 하였고, 1915년에 사망하여 중국 平頂山에 안장되었다. 실제로 류인석의 묘소는 한해 뒤인 1935년에 고향인 춘천시 남면 가정리로 이장되었고, 현재 강원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直窩는 柳濟咸(1884~1960)을 이른다. 류제함은 이소응의 문인으로 자는 士亨이고, 본관은 고흥이다. 류인석의 양자로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