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0월 24일 金華鎭이 述軒 李培仁에게 보낸 간찰이다.
발신인 김화진은 생몰년을 알 수 없으나 柳麟錫 선생 문인록에 따르면 본관은 商山이고, 호는 管山이며 아들은 洪一이다.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수신인 이배인(1873~1945)에게 '大兄'이라고 호칭하고 있어 이배인보다 아래 연배임을 알 수 있다. 이배인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學淵, 호는 述軒이다.
간찰은 書簡, 書信, 書札, 簡牘 등으로 부르며, 고문서 형태로 전해진다. 문집에 수록된 간찰은 '書'로 분류하여 수록하기도 하는데, '서'란 고문서 형태의 간찰이 문집에 수록된 것을 말한다. 간찰은 일반적으로 皮封과 내용으로 구성되고, 내용은 다시 本紙와 別紙로 구별할 수 있다. 흔히 간찰이라고 하는 것은 편지의 본문인 본지를 의미한다. 小紙, 胎紙 등으로도 불리는 별지에는 본지에 적기 어려운 구체적인 내용이나 보내는 선물, 은밀한 부탁이나 청탁 등이 기록된다.
간찰의 내용은 書頭, 候問, 自叙, 述事, 結尾로 나뉜다. 서두에는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안부 인사를 적고, 후문에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다. 자서에는 간찰을 보내는 사람 본인의 근황을 서술하며, 술사에서는 간찰을 보낸 이유를 적고, 결미는 간찰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간단히 끝맺는 말과 날짜, 성명, 올림[재배(再拜)] 등의 항목을 순서대로 적는다.
내용을 살펴보면 김화진은 2일 전에 이배인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그에 대한 답장을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배인은 앞선 간찰을 통해 추운 날씨지만 아버님도 편안하시고, 부모를 모시면서 공부하며 지내는 형편이 좋다고 안부를 전했다. 그리고 그간 서울도 무사히 다녀갔고, 사진에 관한 일도 뜻대로 되었다고 알렸다. 이 소식에 대해 김화진은 자신도 바로 가서 살펴보려 했지만 날마다 사소한 일에 얽매여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한탄스러워하였다.
간찰의 주된 목적은 '租는 今德이 한번 石頭城에 가서 그 계약서의 유무를 알아보려 했으나 바로 당신에게 가면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저들이 먼저 다른 곳에서 뇌물을 받고 허락해주었다면 지금 하려고 해도 빌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방 동쪽을 이전 계약대로 하면 걱정이 없을 듯하니 헤아려서 조처하는 게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여 숙소 계약 문제로 짐작되는 사항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알리고 있다. 또한 가까운 시일에 뵙고 말씀드리겠다고 하여 방문을 예고하였다.
수신인 이배인은 강원도 춘천군 남산면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가 習齋 李昭應(1852~1930)이다. 이배인의 아들 李文白이 간행한 述軒遺稿에 따르면 이배인은 부친 이소응과 마찬가지로 제천 지역 화서학파 인사들과 교류하였으며 부친과 함께 남동막, 공전리, 청풍 안간리, 요동 회인현 대황구 등으로 옮겨 다니며 생활하였다. 이소응 선생은 1911년 서간도로 2번째 망명을 결행하여 1930년 사망 시까지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 간찰이 작성된 1922년에는 봉황성 동대보 서산리로 이주한 시점이므로 이배인 또한 같은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