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고종 1)에 春川府에서 西上面 梧梅里에 거주하는 生員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崔光鍊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최광련의 준호구는 춘천 수성최씨 가문의 문서로, 이 집안에는 총 7통의 준호구가 현전하는데, 그 중 시기적으로 마지막 문서에 해당한다.
문서에 의하면 최광련은 1781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84세였고 본관은 수성이다. 1849년의 준호구와 비교했을 때 거주지가 서상 권산리에서 오매리로 변경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최광련의 父는 成均生員 崔乃秀이고 生父는 學生 崔乃悟이다. 생부가 기재된 것을 통해 최광련은 최내수의 양자임을 알 수 있다. 祖父는 學生 崔準海이고 曾祖父는 學生 崔昇이다. 外祖父는 通德郞 權揄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최광련의 妻 平康蔡氏는 사망하였다. 첫째 아들인 通德郞 崔在聞과 며느리 善山金氏도 사망하였다. 둘째 아들인 幼學 崔在聲(51세)은 생존해 있으며 며느리 全州李氏는 사망하였다. 최재성 이외에도 孫子 幼學 崔夏鉉(26세), 손자며느리 羅州丁氏(27세), 孫子 幼學 崔舜鉉(19세), 孫婦 全州李氏(20세), 庶弟 幼學 崔光繪(41세), 弟嫂 靑松沈氏(27세)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제수인 청송심씨는 1849년의 문서와 비교했을 때 나이가 맞지 않고 출생연도가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 1849년의 문서에 기재되었던 최광련의 아우 최광건과 최광진 및 이들의 가족에 관한 사항은 기재되지 않았다.
최광련이 소유한 노비는 총 43口로, 그 중 남자종은 18구이고 여자종은 24구이며 성별이 기재되지 않은 노비가 1구 있다. 이 노비들의 출생연도는 모두 기재되었으나 부모에 관한 정보는 불분명하다. 이들 중 외거노비는 총 3구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여자종이다. 1구는 광주에 살고 있는 것이 기재되어 있으나 2구는 거주지역이 기재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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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박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