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최광련(崔光鍊) 준호구(準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864.4211-20160501.2015000601
URL
복사
복사하기
·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춘천부(春川府)
수취 : 최광련(崔光鍊)
· 작성지역 춘천부
· 작성시기 同治三年(1864)
· 형태사항 101.0 X 62.5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1 (적색, 정방형, 8.4*8.4, 春川府印)
1 (흑색, 장방형, 12.2*4.0, 周挾改印)
· 원소장처 춘천 수성최씨
· 현소장처 춘천 김현식

연결자료

안내정보

1864년 최광련(崔光鍊)춘천부(春川府)로부터 발급받은 준호구(準戶口)이다. 최광련춘천부 서상(西上) 오매리(梧梅里)에 거주하였고 문서를 발급받을 당시의 나이는 84세였으며 본관은 수성이다. 처(妻) 평강채씨(平康蔡氏)는 사망하였다. 첫째 아들 최재문(崔在聞)과 첫째 며느리 선산김씨(善山金氏)도 사망하였다. 둘째 아들 최재성(崔在聲)은 생존해 있으며 둘째 며느리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사망하였다. 이밖에 손자(孫子) 최하현(崔夏鉉), 손부(孫婦) 나주정씨(羅州丁氏), 손자(孫子) 최순현(崔舜鉉), 손부(孫婦) 전주이씨(全州李氏), 서제(庶弟) 최광회(崔光繪), 제수(弟嫂) 청송심씨(靑松沈氏)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소유한 노비는 총 43구(口)가 있었으며 이들 중 3구는 외거노비이다.

상세정보

1864년(고종 1)春川府에서 西上面 梧梅里에 거주하는 生員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崔光鍊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최광련의 준호구는 춘천 수성최씨 가문의 문서로, 이 집안에는 총 7통의 준호구가 현전하는데, 그 중 시기적으로 마지막 문서에 해당한다.
문서에 의하면 최광련1781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84세였고 본관은 수성이다. 1849년의 준호구와 비교했을 때 거주지가 서상 권산리에서 오매리로 변경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최광련의 父는 成均生員 崔乃秀이고 生父는 學生 崔乃悟이다. 생부가 기재된 것을 통해 최광련최내수의 양자임을 알 수 있다. 祖父는 學生 崔準海이고 曾祖父는 學生 崔昇이다. 外祖父는 通德郞 權揄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최광련의 妻 平康蔡氏는 사망하였다. 첫째 아들인 通德郞 崔在聞과 며느리 善山金氏도 사망하였다. 둘째 아들인 幼學 崔在聲(51세)은 생존해 있으며 며느리 全州李氏는 사망하였다. 최재성 이외에도 孫子 幼學 崔夏鉉(26세), 손자며느리 羅州丁氏(27세), 孫子 幼學 崔舜鉉(19세), 孫婦 全州李氏(20세), 庶弟 幼學 崔光繪(41세), 弟嫂 靑松沈氏(27세)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제수인 청송심씨1849년의 문서와 비교했을 때 나이가 맞지 않고 출생연도가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 1849년의 문서에 기재되었던 최광련의 아우 최광건최광진 및 이들의 가족에 관한 사항은 기재되지 않았다.
최광련이 소유한 노비는 총 43口로, 그 중 남자종은 18구이고 여자종은 24구이며 성별이 기재되지 않은 노비가 1구 있다. 이 노비들의 출생연도는 모두 기재되었으나 부모에 관한 정보는 불분명하다. 이들 중 외거노비는 총 3구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여자종이다. 1구는 광주에 살고 있는 것이 기재되어 있으나 2구는 거주지역이 기재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유재춘, 강원도내 戶口 古文書의 현황과 특이사례에 대한 검토, 古文書硏究39, 한국고문서학회, 2011
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6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박진이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