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7년(정조 1)에 春川府에서 西上面 權山山에 거주하는 幼學 崔白海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춘천 수원최씨 가문의 문서로는 총 7통의 준호구가 현존하고 있다. 첫 번째 문서는 1759년에 작성되었고 마지막 문서인 일곱번째 문서는 105년 뒤인 1864년에 작성되었다. 시기 차이를 두고 작성된 총 7통의 준호구를 통해 수성최씨가의 가계 변화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해당 문서는 첫 번째 문서가 작성된 지 18년 후에 작성된 두 번째 문서이다.
조선시대의 준호구는 신분과 재산에 대한 증명서로 사용되었다. 준호구는 각 가문이 필요로 할 때 관에 신청하였으며 관에서는 호적대장의 내용을 근거로 이를 등서하여 발급해 주었다. 준호구의 형식은 경국대전에 기재되어 있는데 발급일과 발급관서를 먼저 기재하고 '考干支成籍戶口帳內'로 시작한다. 이후에는 주호의 거주지와 가족구성원, 주호와 처의 사조 및 거느린 노비에 대해 連書한다. 해당 문서는 가족사항에 대해서는 列書로 작성하고 노비에 관한 내용은 연서하였다.
문서에 따르면 최백해는 1731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47세였고 본관은 수성이다. 최백해의 父는 學生 崔昇이고 生父는 幼學 崔晜이다. 최백해는 최승의 양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祖父는 學生 崔泰崇이고 曾祖父는 學生 崔燧이고 外祖父는 學生 朴齊乾이며 외조부의 본관은 밀양이다. 최백해의 출생연도와 사조의 관한 내용이 1759년 문서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최준해가 최백해로 개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족구성을 살펴보면 妻 全州李氏는 사망하였고 아들 童蒙 崔宗胤(18세)과 사위 幼學 趙白圭(20세)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소유 노비는 총 18口로 남자종이 11口, 여자종이 7口이다. 이를 1759년 준호구에 기재된 노비 숫자와 비교하면 14구가 늘어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노비의 출생연도는 모두 기재되었으나 노비 부모에 대한 정보는 불규칙적으로 기재되는 특징을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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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박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