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923년 平山申氏를 중심으로 결성된 宗稧의 설립 및 운영 등의 제반 사항을 기록한 '平山申氏壯節公墓所宗稧案(약칭 종계안)'이다.
평산신씨는 고려 충신 壯節公 申崇謙(?~927)을 시조로 한다. 신숭겸은 후백제 견훤과의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하여 순절하여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고려 태조 왕건은 춘천에 신숭겸의 묘소를 조성하여 주었고, 그의 후손들은 평주에 三太師祠, 곡성에 德陽祠, 대구에 表忠祠, 춘천에 道浦書院 등의 서원·사우를 세워 신숭겸을 배향하는 등 고려와 조선시대에 순절의 표상으로 명성이 있었다.
평산신씨는 14대에 이르러 掌令公派, 典書公派, 正言公派, 文僖公派, 思簡公派 등 25개의 계파로 분파되었다. 이 중 춘천에 거주하는 평산신씨는 정언공파와 사간공파로 구성되었고 장절공 신숭겸의 묘소가 위치한 서면을 중심으로 세거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종계안은 序文과 凡例 그리고 契員列錄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후손 申性植이 작성한 서문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종계 설립의 필요성, 둘째는 종계의 설립 과정, 셋째는 종계의 결성으로 얻게 되는 효과를 주로 서술하였다. 첫 부분에서는 평산신씨에서 종계가 결성되지 않은 이유를 시조인 장절공 신숭겸의 충성과 절개가 만세의 모범이 되어 받들어 모시고 우러러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필요성이 없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의 도가 쇠약해지고 후손들에게 큰 재앙이 내려온 시기여서 일상적인 예절은 물론이고 덕을 숭상하고 현자를 추앙하는 일 자체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종계를 결성하여야 함을 서술하였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후손 申楨과 申錫硉이 춘천 방동리에 있는 장절공 신숭겸의 묘소에 묘제를 지내러 왔다가 묘소 주변에 예전과 같이 적합한 儀物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향유사 申弘善과 함께 종계 설립을 발의한 내용을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전에도 신홍선이 춘추의 묘제에 참여하는 일부 인원과 성묘하는 이들에게 금전을 받아 계원록에 입록시키고 묘제 비용에 보태어 사용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이때를 기점으로 종계가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이 종계는 장절공 신숭겸을 위하여 설립되는 것이므로 장절공 신숭겸의 학문과 절개를 본받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부모에게 효도하여 그 덕을 완성하면 앞날에 상서로움이 깃들게 될 것임을 서술하였다.
범례는 모두 6조목으로 되어 있다. 첫째 평산신씨는 충신 장절공 신숭겸의 후손이므로 서로 수양에 힘써 조상을 욕되게 하지 말자는 결의가 담겨 있다. 둘째 서울과 지방의 종족들이 종계에 입회하는 것은 한꺼번에 모아 入隨錄을 따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 祭田, 祭器, 燕器, 燕盤 등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두 종류의 둔다는 것인데 하나는 향교나 서원의 청금록 형식에 따라 이름, 字, 생년, 거주지, 派系를 자세히 기록하여 稧宗案으로 삼고 다른 하나는 금전의 수입과 지출에 관한 장부를 두며 이것은 모두 유사가 관리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종계의 입회비용을 한 명당 50錢으로 정한 것이며 마지막 여섯째 계회일은 정기적으로 매년 봄·가을 향사하기 전날로 정하였다.
계원열록은 앞서 범례에서 말한 장부 중의 하나로 종계에 입회한 이들에 관한 정보가 정리되어 있는데 총 61명이 기록되었다. 이 중 11명은 1923년 종계의 설립 논의 이전부터 입록된 자들이고 그 이후로는 1933년, 1939년, 1940년, 1946년, 1948년에 입록된 자들이다. 이들은 거주지는 모두 21개 지역으로 경성, 평산, 김화 순인데 도별로 다시 정리하면 강원도 지역의 거주자가 전체의 1/3을 차지하였다. 또한 계파는 8개로 세분되었는데 이중 문희공파가 21명, 정언공파가 12명이므로 이 두 계파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이 종계안은 1923년부터 1948년까지 25년간 장절공 신숭겸 묘소를 구심으로 하여 전국 각지의 평산신씨가 모여 동족간의 화합과 결속을 도모하면서 작성된 것이다. 이 문서의 작성시기가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 발발 이전 시기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조선후기의 동족조직이 해체되어 가던 현상과 비교하여 평산신씨의 동족활동을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