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907년 4월 1일에 宋哲憲이 보낸 간찰이다.
간찰은 書簡, 書信, 書札, 簡牘 등으로 부르며, 고문서 형태로 전해진다. 문집에 수록된 간찰은 '書'로 분류하여 수록하기도 하는데, '서'란 고문서 형태의 간찰이 문집에 수록된 것을 말한다. 간찰은 일반적으로 皮封과 내용으로 구성되고, 내용은 다시 本紙와 別紙로 구별할 수 있다. 흔히 간찰이라고 하는 것은 편지의 본문인 본지를 의미한다. 小紙, 胎紙 등으로도 불리는 별지에는 본지에 적기 어려운 구체적인 내용이나 보내는 선물, 은밀한 부탁이나 청탁 등이 기록된다.
간찰의 내용은 書頭, 候問, 自叙, 述事, 結尾로 나뉜다. 서두에는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안부 인사를 적고, 후문에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다. 자서에는 간찰을 보내는 사람 본인의 근황을 서술하며, 술사에서는 간찰을 보낸 이유를 적고, 결미는 간찰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간단히 끝맺는 말과 날짜, 성명, 올림[재배(再拜)] 등의 항목을 순서대로 적는다.
내용을 살펴보면, 지난번에 이별하고 나서 그리워하던 차에 편지를 받고 기뻤으며, 부모님을 모시며 지내는 형편이 어떠하신지 물으며 시작하고 있다. 자신은 아버지를 여의고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고, 늙으신 어머니가 편안하지 않아 매우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그리고 문집 간행이 武溪에서 시작되었으나 돈이 오지 않았으며, 일이 시작된 지 이미 오래되어 비용이 적지 않은데, 어떻게 끝낼지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이어서 수신인이 보내준 두루마리 종이 4塊, 2斧는 잘 받았고, 비용은 바로 부쳐야하지만 갚을 물건이 없어 나중에 전해 드릴 계획이라 하였다.
발신자인 송철헌은 宋時烈의 후손으로 1870년(고종 7)에 태어났고, 본관은 恩津이며 1888년(고종 25)에 式年試에 진사로 합격한 인물이다. 자신을 '孤子'라 표현 했는데, 고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셔 상중에 있는 자식을 말한다. 따라서 정미년은 1907년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송철헌은 아직 삼년상이 끝나지 않아 저렇게 자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송철헌의 부친은 宋秉璿(1836~1905)으로 조선 말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선 인물이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벼슬을 하사했으나 거절하다가 일제가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請討凶賊疏를 올렸다. 또한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賢良을 뽑아 쓸 것 등의 十條封事를 올렸다. 후에 국권 강탈에 대한 통분으로 음독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등을 말하며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김효경, 조선후기 간찰의 피봉 서식 연구, 서지학연구 33,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