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년(순조 13) 義城官에서 幼學 鄭祐三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 문서는 계유년(1813)에 성적한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주호 정우삼은 을묘(1735)생으로 79세이고, 본관은 연일이다. 1807년 준호구의 주호는 鄭夢三으로 정우삼과 다르지만 이 둘의 나이, 사조사항, 처의 인적사항이 동일하므로, 정몽삼에서 정우삼으로 개명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807년 문서에서는 주호의 생년이 갑인년(1734)이었지만 본 문서에서는 1년 뒤인 을묘(1735)생으로 기재하고 있다. 주호의 나이를 고려할 때 정우삼의 생년간지는 을묘생으로 짐작된다.
주호의 거주지는 義城縣 下川面 第院旨里로 지금의 의성군 봉양면 화전동 일대로 짐작된다.
주호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學生 鄭連望이고, 조부는 直長 鄭鳴啇이며, 증조부는 老職 僉知中樞副使 鄭明言이다. 외조부는 老職 通政大夫 嚴相東으로 본관은 영월이다. 이전 1807년 준호구에서 증조부의 직역인 僉知中樞府事의 '府事'가 본 문서에는 '副使'로 기재되어 있다.
가족으로는 아들 鄭福先과 며느리 金姓이 있다. 1807년에 기재된 처 權姓이 본 문서에는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아들 정복선은 34세로 정유(1777)생이고, 며느리 김성은 24세로 경술(1790)생이고, 본관은 김해이다. 정복선의 나이가 생년간지와 맞지 않는다. 정복선이 기재된 문서는 이 문서 밖에 없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지만 정복선의나이가 37세이거나 생년이 경자년(1780)이어야 한다.
소유한 노비는 여자종 1口가 있다. 여자종 命丹은 46세로 무자(1768)생이다.
문서를 살펴보면 문서의 좌측에 行縣令의 署押이 확인되고, 중앙 하단부분에서는 周挾無改印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주호의 생년간지를 끼워 넣어 수정한 흔적과, 노비의 간지를 고친 흔적이 확인된다. 문서의 우측에는 官印을 찍었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文書의 작성 과정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신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