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효자공실기(孝子公實記)

ㆍ자료UCI: KNU+GWKSMC+KSM-XG.1970.4217-20160501.2015000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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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가계기록 | 사회-가족/친족-종중/문중자료
· 작성주체 발급 : 동해 울진장씨(東海 蔚珍張氏)
· 작성지역 강원도 삼척군
· 작성시기 庚戌(1970)
· 형태사항 28.9 X 18.9 | 1책 | 종이 | 한자 | 성책
· 원소장처 삼척 울진장씨
· 현소장처 동해 울진장씨

안내정보

효자공실기(孝子公實記)는 동해 울진장씨 가문에서 그의 선조인 부호군(副護軍) 효자공(孝子公) 장인국(張仁國)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그 주요내용은 장인국의 뛰어난 효행을 포창한 완문, 포창된 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여각과 비문을 건립하면서 작성된 비문, 상량문, 시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효자공실기는 일제강점기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시기에 특정 가문에서 선조의 업적을 추앙하는 방식을 직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상세정보

孝子公實記는 동해 울진장씨 가문에서 그의 선조인 副護軍 孝子公 張仁國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작성한 기록이다. 이는 目錄, 襃彰完議文, 閭閣碑文, 閭閣上樑文, 副護軍孝子公碑文, 閭閣移建落成韻, 跋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록은 해당 기록의 구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이어질 내용의 제목을 나열하였는데 이 중에는 '부호군효자공비문'만 누락되어 있다.
표창완의문은 孔夫子聖績圖續修五倫行實重刊淵源儒林鄕約本所(이하 본소로 약칭)에서 작성한 것이다. 본소에서는 공자 탄생 2470년(1919)을 기념하여 공자의 사당을 창건하고 '五倫行實'을 중간하였다. 그리고 인근 지역의 여러 유림들에게 표창할 만한 인물에 대한 추천을 받았고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득표를 얻은 장인국을 표창하였다. 여기에는 都有司 鄭成默, 約長 前判書 李載現을 포함하여 각 도의 도유사까지 모두 29명이 참여하였다.
'여각비문'은 장인국이 효행으로 표창되고 난 후 이를 기리기 위해 여각과 비문을 세웠다. 이에 장인국의 후손 張秉和嘉善大夫 前京畿道觀察使原任 奎章閣侍制 趙重穆에게 부탁하여 1949년에 기문을 받았다. 그 내용은 표창완의문과 대동소이한데 장인국의 효행을 칭송하였다.
'효자공여각상량문'도 여각을 건립할 때 작성된 것으로 1947년 溟州 金演善이 집필하였다. 상량문의 내용도 표창완의문과 여각비문의 내용과 큰 차이 없이 장인국의 효행을 중점적으로 기술하였다.
'부호군효자공비문'도 장인국의 효행실적을 서술한 것인데 이 역시 후손 장병화강릉 崔晩熙에게 부탁하여 1948년에 작성된 것이다.
'효자공여각이건낙성운'은 효자공의 여각을 쇄운리에서 귀운리로 옮겨 짓게 됨에 따라 인근의 유림들이 여각이 완공됨을 기념하여 지은 시를 모아 기록한 것이다. 시를 짓는데 참여한 이들은 90여명에 이르고 또한 강릉, 삼척, 영월, 울진 지역에 거주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발문은 1970년 장인국의 현손 張錫祚이 서술한 것이다. 그 주요 내용은 효자공의 정려를 쇄운리에 창건하였으나 그 뒤로 세 번 옮겼고 다시 귀운리 병산으로 옮기게 된 과정에 그에 대한 간략한 술회를 덧붙였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장인국의 효행실적은 다음과 같다. 장인국울진에서 태어나 90세가 되었을 때 임금의 총애를 받아 관직이 통정대부 부호군에 이르렀다. 그는 울진장씨 太史公 張末翼의 후예로 궁벽한 마을에서 태어나 학문에는 어두웠으나 태어날 때부터 효성이 깊어 부모를 섬기는 도리가 있었다. 겨우 9세가 되었을 때 부친이 위중한 병을 앓자 잠시도 그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시중을 들었다. 또한 사방에서 약재를 구하였으나 약재를 찾을 수 없어 길가에서 울부짖자, 신선이 취병산 정상까지 이끌어 주어 영약 3개를 얻을 수 있었다. 부친은 그 영약으로 약간의 차도가 있었으나 몇 개월 후에 병이 다시 깊어져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장인국은 부친의 상에 크게 애통해하였으나 襄禮를 마친 후에는 모친의 병환이 더욱 극심하였다. 그는 모친의 병환에 알맞은 약을 백방으로 구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손가락을 절단한 뒤 그 피를 모친에게 드려 몇 일간 소생할 수 있었지만 결국 모친도 사망하였다. 이로서 장인국은 상장례를 마치고 祭奠을 한결같이 예에 따랐고 3년간 여막살이한 뒤 다시 3년간 추복하여 朝夕으로 곡하고 朔望으로 묘소를 돌보았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모두 경탄해하였다.
이처럼 효자공실기의 내용을 토대로, 효자공 장인국의 효행을 표창하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효행을 정려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일제강점기에는 유림들이 세운 단체에서 효행을 표창하는 실제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동해 울진장씨 가문에서 실기를 편찬하고 閭閣·碑 등의 건축물을 세우는 등 선조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노력이 있었고 이것이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박선영, 일제강점기 효행표창 현황과 성격, 전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5
이희환, 조선 말기의 정려와 가문 숭상의 풍조, 조선시대사학보17, 2001
박주, 조선시대 효자에 대한 정표정책, 한국사상사학10, 1998
집필자 : 고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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