隱溪遺事는 춘천 고흥류씨 가문에서 세전되어 온 것으로, 1856년 柳孟敎(1832~1893)가 족숙 柳晳(1791~1856)의 행적을 기록한 저작이다.
춘천 고흥류씨는 고려 때의 무신 柳淸臣(1257~1329)을 시조로 한다. 17세기 무렵 어우당 류몽인의 친형 柳夢彪의 후손들이 춘천으로 이거한 이래 현재까지 남면 가정리를 중심으로 20여호에 이르는 동족마을을 유지하고 있다. 입향조는 류몽표의 아들이며, 승문원 정자·예문관 검열·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낸 柳潚(1564~1636)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 류맹교는 조선말기 화서학파의 대표적인 문인 柳重敎와 동일 인물인데, 맹교는 그의 초명이다. 류중교의 자는 穉程, 호는 省齋이고 화서 이항로에게서 수학하였고 이항로와 함께 역사서 宋元華東史合編綱目를 편찬하였다. 또한 이항로의 사후에는 論調補華西先生心說를 지어 김평묵과 心說에 관한 논쟁을 하였던 것이 유명하다. 류중교의 문집 省齋集에 따르면, 류석이 사망한 뒤 류석의 손자 柳承翰 등이 조부의 덕행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류중교에게 遺事의 저술을 부탁하였기 때문에 이 저작이 남겨질 수 있었다.
저작의 대상이 되는 류석은 아직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로 한말 의병장 毅菴 柳麟錫(1842~1915)의 조부이다. 그의 자는 曾五이고 호는 隱溪이며 부인은 전주이씨 李東焃의 딸이다. 부친은 柳榮源(1774~1849)인데 자는 仁之, 호는 如愚堂이다. 평소에 시를 많이 지어 시문집을 남겼으며 그의 행장은 중암 김평묵이 지었다. 조부는 柳瓘(1750~1815)으로 자는 子東이다. 1851년에는 조부와 부친이 모두 효행이 지극하다는 세간의 평에 따라 조봉대부 행동몽교관으로 증직되었다.
이 저작은 내용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류석의 世系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류석의 행적에 관한 것이며 마지막은 류석이 후손에게 내린 가르침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는 공의 성씨, 이름, 자, 본관을 기록하고 시조 류청신과 입향조 류숙에 관한 주요 사항을 기재하였다. 그리고 조부․종조부․부친이 효행이 탁월하여 동몽교관으로 증직된 일을 중요하게 기록하였다. 그 다음 생년월일과 사망월일, 부인 전주이씨에 관한 인적사항,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조카 柳孟坤을 입양한 것, 딸을 權敎一에게 시집보낸 것, 손자 3명 중 장손은 柳承翰이고 차손은 柳承鱗인데 족숙 柳孟善에게 출계한 것과 손녀 3명 중 장손녀가 安鍾祜에게 출계한 사실, 외손은 1남 2녀을 두었다는 것을 차례대로 기록하였다.
두 번째는 공의 성품이 태어날 때부터 순후하고 근엄하며 아량이 있었고 효행으로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나 이를 본받아 자랐으며 어릴 적부터 어떤 말과 행동도 선대의 유훈을 어긴 적이 없었음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공이 가릉정사에서 季氏 어른을 밤새 간호하며 정성을 다한 것을 가문에서 전해오는 심법을 받든 일화로 소개하였다. 이외에도 공의 모친 홍씨의 본종에 후사가 없게 되자 공이 힘써 양자를 세운 사실, 누이 윤씨의 며느리가 슬하에 자식 없이 과부가 되자 또 양자를 세워 양육하게 하고 가법을 받들게 한 사실도 함께 정리하였다.
세 번째는 공이 자손에게 경계하며 내린 유훈으로, 저자인 류중교가 직접 공에게서 듣고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던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사대부가 비록 불행에 이르러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품행에 힘써 죽음에 이르러서도 바꾸지 않으면 천지신명이 감복하는 날이 올 것이다. 따라서 너희들은 영화로움이 다른 사람보다 못한 것을 근심하지 말고 실천하는 것을 굳게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하였다.
이 저작은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던 19세기 향촌의 인물 류석의 행적을 새로 발굴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또한 류석을 통해 춘천 고흥류씨 가문이 중요하게 여긴 가치와 이것이 후손에게 전승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즉 류석은 한말 척사의리를 보존하고 전승하려고 했던 의암 류인석의 조부라는 점에서, 류석의 유훈은 류인석이 위정척사 사상을 형성하고 실천하려고 했던 부분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