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조씨(橫城趙氏) 가첩(家牒)

ㆍ자료UCI: KNU+GWKSMC+KSM-XG.0000.4273-20170501.2016000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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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가계기록 | 사회-가족/친족-종중/문중자료
· 작성주체 발급 : 횡성조씨(橫城趙氏)
· 작성지역 강원도 횡성군
· 작성시기 [조선후기]
· 형태사항 9.3 X 4.3 | 1장 | 종이 | 한자 | 절첩
· 원소장처 횡성 횡성조씨
· 현소장처 횡성 횡성조씨

안내정보

횡성조씨(橫城趙氏) 가첩(家牒)은 조종묵(趙鍾默)과 그의 양자 조기황(趙基璜)이 작성한 족보의 일종이다. 가첩은 상하의 직계 혈연만 기록하는 가승보와 작성 양식은 동일하지만 휴대가 편리한 절첩의 형태로 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다. 이 문서는 작성자와 작성내용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양자 조기황이 기록한 것으로 시조 趙昱부터 31세 趙基璜까지 총 31명의 인물에 관한 주요 행적, 혼인 관계, 가족사항, 묘지 위치 등을 정리한 것이다. 둘째는 조종묵이 기록한 것으로, 특별한 행적이 있는 조상들의 행적과 업적을 보다 자세하게 작성한 것이다. 이 문서는 횡성조씨가 횡성으로 입향하게 된 계기와 현재까지 세거하게 된 이유를 추적하는 단서를 주는 자료이므로 지역사 및 사회사 연구에 도움이 된다.

상세정보

橫城趙氏 家牒은 趙鍾默趙基璜이 작성한 가승보의 일종이다. 이 가첩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앞부분은 조종묵의 계후자 조기황이 기록한 것으로, 시조 趙昱부터 31세 趙基璜까지 총 31명의 인물에 관한 주요 행적, 혼인 관계, 가족사항, 묘지 위치 등을 순차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뒷부분은 조종묵이 기록한 것으로, 앞서 기록한 직계 조상을 포함하여 특별한 행적이 있는 조상인 上護軍公 趙遴, 大司諫公 趙誠立, 砥平公 趙嶖, 承旨公 趙湜의 주요 약력을 기록한 것이다.
가첩은 가승보와 같이 자신의 직계 계통 및 존속을 위주로 가문에서 필요로 하는 주요 정보를 기록한 보첩류인데, 휴대하기 편리하도록 첩의 형태로 제작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가첩은 각 가문의 내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부족한 내용을 보충하기도 쉬운 장점이 있어 조선시대에 널리 활용되었던 형태이다.
이 가문의 계보를 살펴보면 시조 趙昱 - 2세 趙承藺 - 3세 趙潤益 - 4세 趙周祚 - 5세 趙正臣 - 6세 趙時彦 - 7세 趙永仁 - 8세 趙沖 - 9세 趙季珣 - 10세 趙抃 - 11세 趙文瑾 - 12세 趙茂 - 13세 趙弘道 - 14세 趙荊 - 15세 趙孝禮 - 16세 趙哲守 - 17세 趙俊 - 18세 趙應世 - 19세 趙遴 - 20세 趙誠立 - 21세 趙崙 - 22세 趙孝乾 - 23세 趙澄 - 24세 趙英相 - 25세 趙爗 - 26세 趙復元 - 27세 趙錫閔 - 28세 趙雲漢 - 29세 趙秀彦 - 30세 趙鍾默 - 31세 趙基璜까지를 단선으로 기록하였다.
시조 조욱趙翌과 동일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평장사 趙瞻의 아들이다. 횡성조씨가 조욱을 시조로 삼은 것은 그가 橫川君에 봉해졌기 때문인데 고려 때 교주도 횡천은 지금의 강원도 횡성이다. 조욱고려 광종 9년(958)에 처음 실시한 과거에 1등으로 급제하였고 한림학사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세 조승린과 3세 조윤익中書門下侍中을 지냈고 4세 조주조中書丞, 5세 조정신閤門知候을 지냈다. 7세 조영인부터는 관력을 포함하여 시호, 행적, 가족사항 등이 보다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조영인門下侍中, 修文殿太學士 등을 거쳐 太子太傅로 관직을 마쳤다. 향년 70세에 사망하였는데 왕이 그를 애도하기 위해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시호 文景이 내려졌다. 첫째 부인은 남양홍씨參知政事 洪至奕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파평윤씨博士 尹子固의 딸이다. 둘째 부인과의 슬하에 아들 趙準, 趙沖을 두었다.
앞서 살펴본 2세부터 6세까지는 대체로 역임한 관직명이 간단히 기록된 반면 앞으로 살펴볼 8세부터는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관력을 기록한 것이 특징적이다. 8세 조충門下平章事, 修文殿太學士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몽골・동진과 연합하여 강동성을 공격해서 거란군을 항복시킨 전공이 있다. 향년 50세에 사망하였고 시호 文正을 하사받았다. 부인은 동주최씨평장사 崔詵의 딸이며 슬하에 趙伯琪, 趙叔昌, 趙季珣 세 아들을 두었다. 9세 조계순문하시중평장사, 樞密院副使, 戶部尙書, 判禮部事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시호는 光定이다. 첫째 부인은 우봉최씨崔忠獻의 딸이며 둘째 부인은 행주기씨奇允肅의 딸이다. 첫째 부인과의 관계에서 아들 趙植을 낳았고 둘째 부인과의 관계에서 趙抃, 趙晐, 趙宥 삼형제를 낳았다.
10세 조변知密直事, 典理判書, 上護軍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金方慶의 딸인 안동김씨와 혼인하여 趙文瑾, 趙文簡 두 아들을 두었다. 11세 조문근同修國史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崔瑞의 딸인 해주최씨와 혼인하여 趙茂, 趙蘊, 趙琮 세 아들을 두었다. 12세 조무開城府尹을 지냈으며 李芬의 딸인 덕수이씨와 혼인하여 趙弘道를 두었다. 13세 조홍도嘉善大夫 漢城左尹을 지냈으며 鄭世雄의 딸 영천정씨와 혼인하여 趙荊, 趙璂, 趙敏, 趙盟을 낳았다. 14세 조형에 대해서는 화재로 인해 관련 기록이 소실되어 알 수 있는 사실이 거의 없고 다만 趙孝禮, 趙孝智 두 아들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15세 조효례는 여러 차례 수령에 임명되었고 折衝將軍 行滿浦鎭兵馬僉節制使에 이르렀으며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이 되었다. 풍천任孝明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趙哲守를 두었다. 묘소는 홍천 化村에 위치한다. 16세 조철수彰信校尉, 行忠武衛을 지냈고 金守溫의 딸인 영동김씨와 혼인하여 趙俊, 趙胤 두 아들을 두었다. 묘소는 조효례와 마찬가지로 홍천 화촌에 위치한다. 17세 조준通訓大夫 行平壤府庶尹을 지냈고 高荊山의 딸 횡성고씨와 혼인하여 아들 趙應世를 두었다. 묘소는 횡성 望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망백은 현재 횡성군 우천면 정암리(덕고마을) 일대이다.
7세 조영인부터 17세 조준까지의 가족사항을 보면 부인과 아들에 관한 기록만 있고 딸에 대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18세 조응세부터는 딸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어 나타나며 특히 사위의 인적정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기록방식의 변화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字號, 생몰 간지 등도 추가적으로 기재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횡성조씨 내에서 딸의 존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해석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후대로 내려올수록 전해진 정보량이 풍부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18세 조응세는 호가 隱隱堂인데 通訓大夫 行濟用監副正을 지냈고 盧佐의 딸과 두 번째로 혼인하여 1녀 3남을 낳았다. 사위는 弘文館修撰 河應臨이고 첫째 아들은 趙進, 둘째 아들은 趙遴이다. 묘소는 횡성 망백에 있다. 19세 조린折衝將軍 龍讓衛副護軍을 지냈고 漣川縣監에 재임할 당시 정사를 잘 운영하여 명망이 있었다. 경서에 능통하여 '讀書講義'와 '褦襶錄'을 저술하였다. 金世輝의 딸 광주김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趙誠立, 趙恭立, 趙命立이고 사위는 병조좌랑 李慶流, 별좌 李䄩, 八川君 鄭基廣이다. 묘소는 興原倉에 있는데 이곳은 현재 원주시 법천동 일대이다.
20세 조성립은 자가 汝修, 호가 一笑軒인데 司諫院大司諫이다. 첫째 부인 昌寧成氏와 혼인하여 1녀를 두었고 둘째 부인 韓鏞의 딸 청주한씨와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趙崙, 사위는 判官 鄭昌祖, 弼善 安時賢이다. 묘소는 조응세와 같이 원주 흥원창에 있다. 21세 조륜통덕랑으로 韓師望의 딸 청주한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5남을 두었다. 묘소는 망백에 있다. 아들의 이름은 차례대로 趙孝乾, 趙悌乾, 趙忠乾, 趙信乾, 趙行乾이다. 22세 조효건李斯立의 딸인 光州李氏와 혼인하였다. 묘소는 망백에 있다.
23세 趙澄宋奎明의 딸인 진천송씨와 혼인하여 趙英相, 趙英彙를 낳았다. 묘소는 횡성 墨芝洞에 있다. 24세 조영상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성취가 있었으며 고을에서 문장으로 명성이 있었다. 成時迪의 딸 昌寧成氏와 혼인하여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趙爗, 趙㫜, 趙昉이다. 묘소는 鳥谷에 있는데 이곳은 현재 횡성군 횡성면 일대이다. 25세 趙爗통덕랑으로 洪時習의 딸 南陽洪氏와 혼인하여 3남을 두었다. 아들은 趙復元, 趙復來, 趙復亨이다. 묘소는 昭節里에 있다.
26세 조복원은 일찍부터 문학에 뛰어났으나 은은당 조린의 유지를 받들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산수에서 노닐었다. 元孝克의 딸인 原州元氏와 혼인하여 3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趙錫閔, 趙錫淵, 趙錫曾이고 사위는 權正敎, 柳熽, 李從簡, 宋樂이다. 27세 조석민趙應煥의 딸 여산송씨와 혼인하여 趙雲漢을 두었다. 28세 조운한 宋亨載의 딸 여산송씨와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趙秀彦이고 사위는 한양조씨 趙尙愚이다. 29세 趙秀彦康柱觀의 딸 신천강씨와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은 趙鍾默, 둘째 아들은 趙秉默이다. 30세 조종묵은 초명이 承烈이고 자는 景武이며 증광진사로 입격하여 가선대부 동지돈녕부도정을 지냈다. 蘭屋 鄭昌時가 행장을 찬술하였고 묘소는 횡성 金寺에 있다. 沈光益의 딸인 청송심씨와 혼인하여 1녀를 낳았으며 사위는 洪建華이다. '횡성조씨대동보'에 의하면 조종묵1868년 '횡성조씨족보'를 편찬할 당시 서문을 찬술하였다.
31세 조기황조종묵의 동생 조병묵의 아들로 조종묵에게 대를 이를 아들이 없어 그의 계후자가 되었다. 李漢鎭의 딸 전주이씨와 혼인하여 2녀를 두었고 조카 趙東鎭을 입후하여 계후자로 삼았다. 이 가문은 1세부터 29세까지는 친아들로 후사를 이어나갔으나 30세와 31세는 친아들이 없어 동생의 아들을 입후하여 계후자로 삼아 계승구도를 완성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上護軍趙遴, 大司諫公 趙誠立, 砥平趙嶖, 承旨趙湜에 관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상호군조린은 천성이 순수하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힘써 실천하였다. 중국 고대의 세 성인을 마치 직접 만난 듯이 그 의심나는 것을 궁구하여 '독서강의'를 저술하였다. 일찍이 金孝元, 李敬中과 같은 마을에 거주하였는데 그들이 조린을 평가하기를 '달빛에 비친 눈처럼 빛나고 봄바람이 얼음을 녹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우복 정경세가 묘갈문을 지었으며 창석 이준이 행장을 지었다.
대사간조성립은 어릴 때부터 품행이 단정하고 학업에 독실하여 사람들이 그의 기량을 칭송하였다. 제주도에 흉년이 들었을 때 공이 이를 성공적으로 구휼하였다. 광해군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사사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였으나 그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산속으로 퇴거하였다. 그 이후로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응하지 않았으며 임종할 때 자손들에게 과거를 보지 말고 은거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평조흡은 그의 아들 木川趙性乾과 유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六行을 모두 갖추어 당대에 명망이 있어서 특별히 관직에 발탁되었다. 승지조식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조야에 명망이 있었다.
횡성조씨가 횡성으로 입향하여 본격적으로 거주하게 된 것은 조선 중기 조준횡성의 토성인 횡성고씨와 혼인한 것과 크게 관련이 있다. 현재 횡성 횡성조씨가 일가를 이룬 횡성읍 정암리는 본래 제주고씨의 터전이었으나 좌찬성 고형산이 뒤를 이을 후사가 없어 그의 외손자인 조응세에게 봉사권과 재산권을 물려준 뒤로 횡성조씨가 이곳에 세거하게 되었다. 따라서 횡성조씨의 입향조는 조응세가 된다.
이 문서는 30세 조종묵을 중심으로 직계 조상을 파악한 것으로 횡성조씨가 횡성에 입향하게 된 계기와 본격적으로 세거하게 된 이유를 추적가능하게 하며 그 인적구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지역사 및 사회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사료이다.
참고문헌
정승모, 한국의 족보,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0
오영교, 강원의 동족마을, 집문당, 2004
집필자 : 고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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