誠敬齋 洪晩厚 行狀은 홍만후(1811~1898)의 사후에 그의 자손이 주요 행적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일반적으로 행장은 죽은 사람의 世系・언행 및 행적・관작・자손 등을 간명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그 후손이나 동문 등에 의해 저술되었다. 이러한 문체는 가문에서 해당 인물의 일생과 평가를 기록하여 후대 자손에게 전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諡狀, 卒記, 碑文 등을 편찬할 때에 기초자료로 활용되었다.
저작의 대상이 되는 성경재 홍만후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행장의 내용을 통해 볼 때 남양 홍씨 중에서도 洪先幸을 시조로 하는 土洪 계열에 해당되며 무오사화 때 참형을 당한 洪澣, 청난공신 洪可臣의 후손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봉화군 일대에서 세거하였으며 관직의 진출에 힘쓰기보다는 '誠', '敬'과 같은 성리학적 개념을 깨닫는 데 치중하고 '孝'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 몸소 실천하였던 인물로 보인다.
행장의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홍만후의 세계에 대해 주로 기록한 것으로 시조와 현조 및 직계 5대조를 정리하였다. 둘째 부분은 홍만후의 일생을 간략하게 기록하였는데 주로 선친의 상례와 제례에 정성을 다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셋째 부분은 저자가 홍만후의 일생 중에서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을 별도로 서술하였다. 넷째 부분은 부인 광주김씨의 품행과 후손을 기록하였다.
첫째 부분을 보면, 府君의 이름은 晩厚, 초명은 世厚, 자는 德叟이다. 본관과 성씨는 남양 홍씨이고 시조는 고려 金吾衛別將同正 홍선행이다. 남양 홍씨는 그 내부에 시조를 달리하는 당홍계와 토홍계로 나뉘는데, 당홍계는 고려 개국공신 洪殷悅을 시조로 하며 토홍계는 홍선행을 시조로 하여 각기 다른 계보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남양 홍씨는 토홍계보다는 당홍계인 경우가 많으며 현재에도 당홍과 토홍의 인구수는 대체로 8 : 2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홍선행의 후손이며 홍만후의 선조로 언급된 인물은 洪胤昌부터 - 洪昷 - 洪可臣 - 洪榮 - 洪宇定 - 洪克 - 洪偰 - 洪再全 - 洪{木運} - 洪始九 - 洪均까지이다. 홍윤창은 內贍寺判官이고 홍온은 掌苑署別提로 益寧府原君에 추증되었다. 홍가신은 호가 晩全인데 문학과 덕행에 뛰어나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일찍이 홍주목사가 되었을 때 청난공신으로 寧原君에 봉해졌으며 右議政에 추증되었다. 홍영은 漢城庶尹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홍우정은 광해군대에 연좌되어 해주로 유배되었다가 이후에 遺逸로 천거되어 특별히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홍극은 長興庫直에 천거되었고 그의 둘째 아들 홍설은 남모르는 덕행과 고상한 행실이 있었으니 그가 홍만후의 五世祖가 된다. 고조 홍재전은 기품과 절개가 있었으나 요절하였고 증조 홍운은 당시의 蒼霞 元景夏와 寄庵 吳泰魯 등이 그 풍채와 절개를 훌륭하게 여겨 여러 차례 천거하였으며 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조부 홍시구는 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선친 홍균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홍만후를 중심으로 그 직계 선조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승보의 작성 방식과 동일하지만 직계 선조를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과 선조의 행적 중에 관력만 기록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둘째 부분을 보면, 홍만후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학문을 배울 때에도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 매우 빨랐다. 12세에 부친 참판공 홍균의 상을 당하였는데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장례에 필요한 여러 도구들을 갖추어서 섭섭함이 없게 하였다. 삼년상이 끝나기 전에 모친의 명을 받아 가묘를 받들고 예전에 거주하던 斗谷에 머물렀다. 본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모친을 봉양함에 정성스러운 마음을 다하여 맛있는 음식을 올렸다.
또한 가난을 이유로 선조를 받드는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제사는 풍성하게 차리는 것에 있지 않고 오직 정결함에 힘쓰고 때를 잃지 말아야 하며 때에 맞춰야 한다고 하며 기일을 귀하게 여겼다. 모든 제수품은 직접 반드시 직접 점검하였고 만년에 기력이 쇠하여 제사에 참여하지 못할 때는 오직 의관을 바르게 하고 잠자리에 엎드려 새벽에 이를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1890년 대왕대비인 조대비의 경사로 인해 老職 6품계를 받았고 1892년 통정대부, 1893년 가선대부가 되었으며 향년 88세로 졸하였다. 이 부분은 홍만후의 총명하고 효성스러운 성품을 언급하고 그 일화로 부친상을 치르는 과정, 모친을 봉양하는 방식, 선조의 제사를 주관하는 모습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품계를 받은 사실을 덧붙였다.
셋째 부분을 보면, 홍만후는 만년에도 선친을 매우 그리워하여 집안에서 귀한 음식이나 새로운 옷을 가져오면 선친이 살아 계신 날에 고기와 비단을 올리지 못했는데 내가 어찌 이를 누릴 수 있겠는가 하며 모두 물리쳤다. 모친의 상에 이르러서는 매우 슬퍼하여 몸을 상하듯이 하고 예제를 뛰어넘었으며 순임금이 부모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그리고 항상 가난하여 학업을 마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집안에 많은 서적을 쌓아두고 마을의 수재에게 빌려주었으며 가문의 자제 중에서 배우지 못한 자를 염려하여 성심을 다해 교육하였다. 자제를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가치는 효도・정성・공경이었다. 효도는 천하의 근본인데,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고 하였다. 정성과 공경은 천하의 큰 도리인데, 정성이 없으면 끝을 이룰 수 없고 공경이 없으면 마음을 세울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저자가 홍만후의 효성을 드러내고 후학에게 전하려 했던 가치를 서술하여 그 됨됨이를 밝히고 이를 후손들이 계승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서술한 것이다.
넷째 부분을 보면 홍만후의 부인 광주김씨는 문정공 金坽의 후손 金恭翼의 딸이다. 시어머니를 정성을 다해 봉양하였으며 가문을 다스릴 때 법도가 있었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길쌈하여 가난한 집안을 구제하였으며 선조의 제사를 위해 마련하는 제수품은 부유한 집안에서 마련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홍만후와 광주김씨 사이에는 아들 洪奭裕이 있으며 손자 洪思潤, 洪思漢, 洪思源이 있다. 이러한 내용은 부인 광주김씨가 남편과 같은 덕이 있어 홍만후를 잘 내조하였음을 기술한 것이다.
이 문서는 홍만후의 세계와 및 그의 성품과 행적을 서술한 것으로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게 하여, 조선시대 평범한 사족의 생애를 연구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또한 가문에서 특정 인물의 행장을 찬술하여 후손에게 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선조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구체적인 방식과 그 전승 과정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